매가박스에서 비제의 카르멘을 상영하고 있어요.
이 오페라의 음악은 워낙 잘 알려진 터라 부연설명은 누가 될 것같습니다.
심혈을 기울여 카르멘을 완성한 뒤 비제는 안도의 긴 숨을 내뿜으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을 거예요.
드디어 메리메의 원작소설 카르멘이 그의 손끝에서 오페라로 만들어져 무대에 올려지게 된 것이지요.
비제의 기대와는 달리 1875년 3월 초연된 카르멘은 기존 오페라에 열광하던 관객들에게 비정하리 만큼 외면당하고 맙니다.
초연 당시 활기차고 화려하게 정제되어 인간의 심금울 고양시키는 천재성이 유감없이 발현된 비제의 오페라 음악은
소설에서 그려지고 있는 유럽의 불가촉 천민인 집시들의 파격적인 주제에 밀려 빛을 잃고 말았지요.
공연 도중 작은 소요가 뭉개뭉개 일어나고 공연이 중반을 지나갈 때 쯤 술렁술렁 온갖 야유가 난무했던 모양입니다.
초연의 그 험상궂은 분위기의 관객들의 싸늘함, 그야말로 감당하기 어려운 충격이 비제를 덮쳤습니다.
한발 앞서가는 작곡가의 천재성을 평범한 대중들은 인지하지 못했던 겁니다.
심약한 천재의 비극은 초연 3개월후 1875년 6월 3일 안타깝게 세상을 떠나고 말지요.
그가 죽은지 불과 몇개월후 그의 최후를 장식한 오페라 카르멘은 대성공을 거두어
오늘에 이르러서는 전세계 대공연장에서 절찬리 공연되고 있어요.
예전에 보아온 돈 호세의 일편단심 순진무구한 사랑은 청춘남녀의 로망이기도 하였지요.
반면 카르멘은 팜므파탈이다 뭐다 해가며 지탄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순수한 사랑을 밥먹듯 배신하는 몰염치를 카르멘에 빗대기도 했구요.
동양과 서양은 꼭 문화의 차이만큼이나 벌어져 있습니다.
불혹과 천명이 지나서일까 이제는 호세 보다 카르멘이 가여워졌습니다.
불같은 사랑은 결코 진정한 사랑이 될수없다는 것을 알아버린 이미 생의 정점을 찍은 뒤늦은 성찰이랄까?
고전의 세계를 헤메다가 우리의 위대한 민족정신이 결집된 동학에서 수운과 해월의 거대한 사상을 만나
아마도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순해졌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수운과 해월은 - 사람은 모두 자신속에 하늘님을 모시었다 - 고 말합니다.
그러하기 때문에 사람이 곧 하늘님이지요.
사람은 하늘님답게 하등의 구애됨없이 있는 그대로 자유롭게 살 권리가 있다고 합니다.
따라서 사람의 삶이란 신성불가침의 고귀한 영역인 것이지요.
다만 사람으로 하여금 자율을 권고할 뿐입니다.
그만큼 확고한 도덕성이 우리 민족성, 아니 모든 사람의 내면에 내재해있다는 확신이있는 겁니다.
호세가 불같은 광기의 사랑을 빌미로 카르멘을 구속하거나 소유할 수 없을 뿐더러
하물며 그녀의 목숨을 빼앗는다는 것은 씻을 수 없는 크나큰 죄를 짖는 것이고 천하의 악행을 저지르는 짓이지요.
자신의 본능적인 삶에 충실한 카르멘의 단순하고 솔직한 사랑이 어쩌면 더 인간적 진정성이 엿보입니다.
호세는 투우사 에스카미요의 등장으로 돌연 카르멘을 향한 질투의 화신이 되고
급기야 어줍잖은 사랑을 빌미로 그녀의 목숨을 빼앗고 말아요.
아 불쌍한 카르멘
문명의 세계란 인간의 본성이 억제된, 이성이 우선하는 사회를 말하겠지요?
카르멘은 인간내면에 남아있는 강렬한 본성의 세계로 우리의 감정을 끌어들입니다.
비제의 음악은 활활 타오르는 불길에 기름을 끼얹는 듯한 격동의 아름다움을 덤으로 줍니다.
엽기적인 아름다움이 스며있는 최고의 오페라.
메가박스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카르멘은 매우 훌륭합니다.
무대에는 거대한 성을 셋트로 설치해놓고
자유자재로 그 셋트를 운용하는 정밀한 무대장치기술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압도적인 위용입니다.
아 카르멘을 너무 야하게 연출하였어요.
예쁘고 마음씨 고운 그토록 사랑하는 미카엘라를 외면하고 카르멘만을 바라보는 호세의 편집증을 불러 이르킬 정도로요.
이점이 좀 아쉽기도 했어요.
비제
카르멘
지휘; 파블로 헤라스 카사도
연출: 리처드 에어
미카엘라: 아니타 하르틱
카르멘: 아니타 라흐벨리쉬빌리
에스카미요: 일다르 아브드라자코프
돈 호세: 알렉산드로 안토넨코
메가박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