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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내린 비

jaye syo 2011. 7. 28. 23:53

예보에 의하면 오늘밤이 고비랍니다

뭔놈의 비가 이렇게 죽어라 내리는지 모르겠습니다

아침신문에는 어제의 강남이 어지럽게 실려있군요

오늘은 아예 맨발에 샌달을 신고 집을 나섰습니다

 

 

 

 

 

 

 

 

 

 

 

 

 

낮에는 간혹 그치기도 하더니

저녘에 본격적으로 또 내립니다

 

인간의 정이라는 것은 인간의 의식 내면에 묶여있는 것이라서 보이지않는다.

그러나 그것과 관련된 인간의 행동은 겉으로 드러나게 마련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인간의 행동이 내면적 眞情을 담고 있을 때는 그 행동이 비록 과격해도 원망을 자아내지 않는다.

그러나 그 행동이 진정을 결여하고 있을 때는 비록 그 행동이 충심에서 우러나오는 것인양 보일지라도 혐오의 대상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의 精一한 경지는 신묘한 기운으로써 타인들이 스스로 변화되게 만들 수는 있지만, 그것을 말로 표현하여 타인을 계도할 길은 없다. .....

그러므로 순임금은 옥좌에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천하가 잘 다스려졌고, 걸임금은 계단을 미쳐 내려오기도 전에 천하는 개판이 되었다.

대저 眞情이라는 것은 말로 위세를 떠는 것보다 훨씬 강력한 것이다.

자기 자신에게 진정성이 없으면서 그것을 타인에게 요구한다는 것은 고금 이래 들어본 적이 없다.

지도지가 보통사람들이 쓰는 똑같은 언어로 말을 해도 백성들이 그것을 믿는 것은 그 믿음이 바로 언어 이전에 있기 때문이다.

보통사람들이 내리는 똑같은 명령을 내렸는데도 백성들이 그것을 받들어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은 그 지도자의 誠意가 그 정령 밖에 있었기 때문이다.

성인이 위에 있기만 하여도 백성들의 마음이 움직여서 변화하는 것은 항상 성인의 진정이 그들 앞에서 이끌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지도자가 위에서 지랄발광을 해도 백성이 콧방귀도 안뀌는 것은 그 진정성과 정책명령이 따로 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역>에 이와같이 말한 것이다.

"항룡에게는 후회할 일만 남아있다"           (회남자 '무칭'편. 원문은 생략)

 

얼마나 적확하고 거대한 담론인가!

4대강정비사업을 아무리 이성적으로 설득시킨다한들,

그 이성적 언어 이전의 진정성, 과연 그 眞意 : 眞情이 무엇인지가 전달이 되지않는 상황에서는 오직 후회할 일만 남아있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가 바로 근대이성의 문제이기도 하다.

칸트는 인간의 도덕을 순수이성을 넘어서는 차원에서 "요청"이라는 방식을 통해 규범적으로 해결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성적 해결방식이다.

그는 종교문제도 이성적 범위를 넘어서지않는 방식으로 해결하려고 했다.

그 철저한 이성에 대한 신념은 패복(佩服)할 만하지만, 그러한 이론은 情을 통한 性의 수련이라는 측면에서는 전혀 기능성이 없다.

정(情)의 수련을 통한 인간도덕의 확보가 서양에서 이루어지지않는 이유는 도덕의 근원이 모두 초월자, 즉 신화적 세계에 뿌리박고 있었기 때문이다.

칸트의 실천이성도 일차적으로는 "신의 존재"와 관련된 것이지, 순수한 人世의 도덕적 정감의 형식이 아니다.

자사와 같은 사상가에 의하여 우리는 이미 수천년에 걸쳐 情의 윤리를 사회적 의식형태로 축적해왔다.

이 동방사회의 장점을 버리고 이제와서 천박한 서구의 이성주의로 회귀한다는 것은 철학적 사유의 유아적 오류를 반복하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우리가 <중용>을 21세기의 새로운 철학으로서 인식해야만하는 소이연이 있는 것이다

 

- 중용한글역주 -  pp234~2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