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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성

jaye syo 2009. 5. 3. 02:48

부처님 오신날

분명 공휴일이렸다

멀리 계신 님을 보랴고 뜰떠있다가

출근하라는 명에 김이 쏙 빠져나간다

 

김종규회장의 말씀으로 십여년전 어느날 춘성의 일화를 접하면서 처음 춘성에 대한 기억이 형성되었다

저자거리에 회자되는 이야깃거리가 늘상 그렇듯이 춘성의 인품에 관계없이

그가 거칠게 내뱉은 방편의 조각들이 술자리의 안주거리로 질겅 씹힐뿐이다

 

법정공휴일에 출근하여 자정무렵 퇴근 어디에 하소연하랴

오후 4시경에 "춘성"을 펼쳤다

정신없이 읽다보니 저녁도 못먹고 밤 11시가 되었다

집에 도착하자 자정을 알린다

 

춘성에 대한 기록이 별로없어 막연하게 6.25이후 망월사에 주석하였다는 것 이외에는 듣지 못하였다

허물어진 절간을 수리하려고 도봉산의 소나무 잣나무를 도끼로 찍다가 들켜서

파출소에 연행되어 조서를 꾸미는데 "본적이 어디요?" "우리 아버지 신두" 

못알아듣고 재차 뭇자 "우리 아버지 자지" 어안이 벙벙해진 경찰관 "고향은 어디요?" "우리엄마 보지속이지"

그때만해도 망월사에서 서울에 볼일을 보려면 시외버스를 타고 비포장길을 왕복하였단다

예나 지금이나 예수를 믿으라는 사람이 많아서 어떤사람이 춘성을 빤히 보며

"예수님을 믿으세요 예수님은 죽음에서 부활하신 분입니다" 큰소리로 외치기에

춘성은 누가 듣거나 말거나 "허 그 예수님은 좆을 닮았나? 내좆은 하루에도 몇번씩 죽었다 살았다 하는데"

이런 이야기가 항간에 수도 없이 떠돈다는 것이었다

 

열세살 어린나이에 백담사에 출가하여 만해 한용운을 스승으로 삼았다

만해가 삼일운동으로 서대문감옥에 3년간 복역할때 망월사에 있으면서 지극정성 옥바라지를 하였다

20세가 되어 강원에 들어가 불경을 치열하게 공부하였고

만공을 만나 그를 스승으로 선에 정진하여 대각 하였다

수좌들의 수행에는 호랑이요 속세대중을 보살핌에는 인자하기 그지없는 어른이었다

죽을때까지 불가의 가르침을 실천하였다는 증언이다

명리만을 추구하는 오늘날의 불교에 춘성이 재조명되어야한다는 것이다

 

각계의 원로라 자처하는 사람들의 인품이 춘성의 인품의 반이라도 따라간다면 ....

 

머리가 복잡하다

그러고보니 내수행은 빵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