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부여 정림사지 5층석탑

jaye syo 2008. 6. 17. 01:09

정림사지 5층 석탑의 의문이 풀리지않아 중언부언하다

 

역사적인 유물을 대할때마다 왜 그리 의문나는 점이 유독 많은지 내자신이 몹시 부끄럽기도 하다

무지에서 오는 열등감의 발로이리라 생각되지만,

그래서 염치불구하고 해설사를 먼저 찾는다

혼자서 해설을 부탁하기가 너무 미안하여 찾아오는 사람들의 무리를 기다리며 정림사지 5층 석탑을 나홀로 미리 살펴본다

그러면 그렇지 약 20여명의 관광객이 경내로 들어선다

해설사가 곧 나서겠지 저 인파에 섞이면 부끄러운 부탁을 안해도 될 것이고

내 무지도 들키지 않을 터이니 오호 오늘따라 일이 잘 풀리는 느낌이다

탑을 한바퀴 돌고 웅장한 건물에 갖힌 미륵불을 살피는 중

경내에 들어선 관광객들이 일본사람들이라는 걸 알고 저으기 실망을 한다

어쩌랴 한참을 기다려도 해설사는 꿈쩍을 하지 않으니

"저~ 해설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몇 분이세요?"

"저 혼자 왔습니다"

이분들이 더 실망하는 눈치다

"부여에 대해선 잘 아시지요?"

"아니 모릅니다. 논산이 고향이지만 부여는 초행이나 마찬가지라서요"

"우선 들어오셔서 차라도 한잔 드시고 시작을 할까요?

"차까지 주시려고요? 고맙습니다"

 

부여에서 살면서 저 탑을 매일 볼 수 있다는 것이 제게는 행운이지요

이 탑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없기 때문에 언제 축조된 것인지는 모르지만

소정방의 기록이 탑신에 있는 것으로 보아 의자왕 이전 어느 시기에 지어진 백제의 탑으로 추정됩니다

미륵사지의 탑과 비견되는 목탑형식의 석탑으로 시기가 매우 이른 초기형태의 탑이지요

신라의 석탑은 탑신에 옥개석을 바로 얹었는데

그 옥개석에 한옥의 다층 공포를 새겨 목탑의 형식을 표현한데 반해

이 탑은 탑신에 한옥의 복잡한 다층 공포를 두리뭉실 하나의 곡선으로 다듬어 따로 얹은 다음

판석과 같은 납작한 옥개석을 그위에 올려 석탑의 딱딱한 이미지를 부드럽게 표현하였지요

더 중요한 사실은 이 탑이 한번도 해체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일본사람이 탑에 내장된 부장품을 꺼내려고 4층 옥개석을 한개 빼내다가 떨어뜨려

1층 옥개석 일부가 깨졌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4층에 있던 부장품만 도둑맞았을 뿐

탑 전체가 해체되는 비운은 피한 셈이 되었지요

그래서 한번도 해체되지않은 처녀탑으로 유일하게 남아있는 것이랍니다

 

해설하시는 이분은 탑의 아름다움에 빠져 좀 더 깊이있게 살피지 못하셨구나

정림사지의 구조를 보아하니 탑 앞에 건물터가 있고 바로 뒤에 목탑인지 금당인지 모를 목조건물터가 남아있다

중국이나 우리나라나 전란이 일어나면 상징적인 건축물에 불부터 지르고 본다 

중국은 모르겠으나 우리나라의 목조건축물의 소재는 주로 단단한 적송을 선호한다

튼튼하고 몇천년을 견디는 그야말로 내구성이 탁월한 나무이다 

그러나 불에는 매우 취약한 단점이 있고 또 불이 붙으면 그 화력이 대단하다

탑신을 자세히 보라

맹렬한 화염에 데여 벌겋게 변색이 된데다가 열화로 인한 푸석푸석 마모의 흔적이 역역하다

탑신이 저 모양인데 옥개석인들 견뎌내랴

아마 옥개석은 몰골이 형편없이 깨지고 뭉개졌으리라

불에 데인 흔적이 탑신보다 더 심했으리라

하지만 이 탑의 옥개석은 불에 의한 변색의 흔적도 열화의 마모도 없이 깨끗하게 층층이 건재하다

신라인들이 백제를 멸하고 통치를 할때는 백제인들이 주눅이들어 저 망그러진 탑을 북원할 용기가 없었다 치자

고려가 개국하며 어지러운 지방정세를 안정시킬 겸 대대적인 정비사업을 벌였을 것이라는 추측은 충분히 가능하다

불교라는 당시의 민간에 널리 퍼진 절대신앙의 유물일진대 어찌 간과할 수 있으랴

복원이후 한번도 해체가 되지않았다면 그 말은 차라리 그럴듯하다

해설하시는 분의 주장대로 탑이 백제시기 건립이후 한번도 해체가 되지않았다고 한다면

육안으로도 쉽게 구분되는 탑신과 옥개석의 상태변화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어찌된 영문인지 저 탑을 바라보는 사학자들의 시선이 너무 교조적인 느낌이다

딱히 기록이 없으면 입을 딱 다물어 버린다

 

저 탑은 최소한 한차례 해체복원된 탑이다

옥개석이 확연히 다르다

 

 

 

 

지난 8일 일요일 부여에서 못 푼 의문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