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부여에 온것은
아마 20년도 넘었을 것이다
오토바이를 타고 나주 영산포를 돌아
집으로 오는 길에 잠시 고란사 낙화암을 본 것이 고작이어서
깊은 무의식속에 분명 미련이 남았던 모양이다
어찌 경주에만 릉원이 있으랴
부여로 접어든 길가에 능산리가 있고
고고한 백제향로가 발견된 옛절터가 그 옆에 있다
"정림사지를 먼저 보세요"
안내원의 말에 따라 찾아간 정림사지는 끝내 발길을 잡고 놓아주질 않는다
향로가 발견된 능산리 옛절터에 복원공사가 한창이다
목탑이 있던 자리에 석재기단부터 다지고 ....
능산리 고분군을 보고 관리인에게 부여를 제대로 보려면 하고 물었더니 ....
정림사지 정면에서 일단 한눈에 담아보고
연지를 지나는데 엄청나게 큰 비단잉어가 유유히 노닐며 반긴다
아니 저건?
오리가 새끼를 거느리고 눈치를 보며 달아난다
사람에게서 가능한 한 안전한 곳이 연못 가운데 연잎이 무성한 곳이라 여긴 모양이다
뒤 늦은 놈은 후다닥 놀라 내 튄다
새끼들은 경계의 위험은 안중에도 없고 어미만 살금살금 눈치를 본다
중간 중간 틈이 벌어지고 깨지고 하였는데 전혀 해체의 흔적이 없다고 해설하시는 분은 주장한다
정면에서 보면 일층 옥개석 일부가 깨져있다
일본놈들이 4층 탑신에 들어있는 부장물을 빼내다가 돌맹이 하나를 널쳐 깨진 것이라고 말한다
이미 고인이 되신 향토사학자가 끈질기게 주장하였으나 믿을 수 없다하여 받아들여지지 않았는데
중앙박물관에서 최근 발행한 도록에 흑백의 옛사진 한장이 실렸는데 자세히 보니 바로 이 탑의 모습이더라고
사진속에서는 4층의 지붕돌이 한개 빠져서 땅바닦에 나뒹굴고 1층 옥개석의 파편이 바닦에 같이 있더라고
다행히 4층 지붕돌 한개만 빼내고 부장물을 도둑질하여 전체가 해체되는 위기를 모면하였다고
해설하시는 분은 자신있게 주장한다
그러면서 해체되지않은 처녀탑은 이 탑 한개뿐이라고
그래서 더 귀중하다고
밖에서 눈비를 맞고 있던 저 미륵불을 더욱 잘 보전하겠다고 거대한 목조건축물을 지어 가두어 놓았다
만약 불이라도 난다면?
목부분엔 시멘트를 우겨넣어 중심을 잡았나 보다
고려때 조성된 석불이라는데 그 근거가 백제때에는 이렇게 커다란 돌불상을 만들지 않았다는 좀 이상한 이유를 댄다
그리고 좌대에 새겨진 문양이 고려때의 문양이라는 것이다
양식이 그렇다는 ....
하지만 서산 마애삼존불의 모습이 이 불상의 표정과 닮아있다
고려는 불교를 숭상한 국가였다
백제불교의 산산히 파괴된 흔적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저러한 형태가 나온 것은 아닐까?
그래서 좌대의 돌 재질에도 다른 것이 섞인 것이 아닐까?
밤꽃향기가 진동을 하더니 저 작은 나무는 열매보다는 꽃을 더 피우고 싶었나 보다
무분별한 발굴은 끝이없다
백제 고려의 기와편들이 저렇게 푸대접을 받고있다
이 건물도 수백년이 지나면 후손들이 자랑스럽게 바라볼 것이라고 해설하시는 분은 자랑이다
쓸데없이 살피는 버릇은 의문에 의문을 부른다
옥개석을 제외하면 나머지 탑신은 몹시 마멸이 심하다
특히 불에 그을려 마모된 흔적이 너무도 뚜렷하다
몸돌이 저 정도라면 툭 튀어나온 옥개석은 말해 무엇하랴
저 돌은 열화되면 발그스레 색깔이 변한다
유독 옥개석만 멀쩡하게 변치않은체 있다는 것은 어느 시기에 해체복원을 했다는 증좌가 아닐까?
해설하시는 분은 절대로 아니다 못박는다
정림사박물관에서
염치도 좋지 해설하시는 분에게 차도 얻어 마시고
책자도 한권 공짜로 얻고
그래서 딱 붙들려 시간을 허비하고야 말았다
최소한 서너군데는 더 봤어야 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