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5 7

노란장미

도시의 골목 경계는 참 모호해 탁 트인 공간 가운데 그냥 벽인지 넘지 못할 선인지 곁눈질 살짝 막는 가리개인지 야트막한 붉은 벽돌담 그야말로 예쁜 내님을 닮은 우아하고 은은한 노란 장미가 우뚝 담을 감싸고 피어 문득 혼과 마음을 홀리네? 열다섯 여린 심성 酒仙의 경지에 오르신 담임선생은 거나한 취기로 게슴츠레 보시더니 너는 평생 칠팔 명의 여자가 따르겠다 복두 많은 놈 혼잣말처럼 하시고 나는 부끄러움에 얼굴 붉히고 친구들은 놀려대고 송이가 유난히 큰 노란 장미꽃 술에 흠뻑 취한 선생님의 뜬얼굴색 풍성한 젊음을 과시하던 내님의 빛깔 투명한 성향의 첫사랑 잠재한 기억 저편의 짝사랑 깊은 사랑의 꿈에 그리는 애인 순간 내 사랑이 머문 도시 골목의 경계 오월 여왕

카테고리 없음 2022.05.18

수선화 / 보리똥꽃

작년에 강남에 사시는 고선생은 뜬금없이 화훼시장엘 데려가서 저 수선화 세 그루와 철쭉 두 그루를 사더니 가져가서 아무 데나 심으라며 떠맡기다시피 안기기에 우리 산 무덤가에 마지못해 심었는데 철쭉은 지난 한파를 이기지 못해 고사하고 수선화는 딱 한그루 싹이 나와 보란 듯이 활짝 피어 자태를 뽐낸다. 보리똥나무는 나이가 몇인지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거기서 거기 올핸 유난히 꽃이 많아 절로 눈길을 끌고 늦가을이나 되어야 겨우 보리알만 한 열매가 붉은 얼굴에 흰점 가득 보일 듯 말 듯 선보인다.

카테고리 없음 2022.05.16

적벽가

80세에 가까이 이른 성준숙 명창의 적벽가를 감상하였다. 고수 : 김청만. 조용복 국립극장/하늘 5월 14일 오후 3시 박동진 명창의 적벽가에 익숙해서인지 성준숙의 적벽가는 사설도 조금씩 다르고 창도 차이가 있다. 노쇠한 몸으로 3시간이 넘게 적벽가를 완창 한다는 것이 한편 놀랍다. 깜빡이는 기억의 끊어짐은 무대 소품으로 놓인 상자 뒤에 몸을 숨긴 조력자의 노고로 그럭저럭 청중의 웃음 속에 이어져 길고 긴 판소리 사설이 완성되었다. 삼국지연의 적벽대전은 조조의 백만 대군이 거의 전멸하는 것으로 그려져 있는 인간 역사의 최대의 비극적인 전쟁사임에도 우리의 판소리로 재구성된 사설은 해학적인 요소로 가득하여 인간사에서 경험할 수 있는 다양한 희비를 걸쭉한 창을 통해 공감하게 된다. 오늘도 역시 득음의 명인을 ..

카테고리 없음 2022.05.14

송하노인

그 어느 날부터 노인들의 쉼터가 되었다. 차가운 돌덩이인데 두꺼운 스티로폼 방석을 깔고 아주 편하게 앉아 세태를 관망이라도 하는 듯 들릴 듯 말 듯 그들만의 언어로 담소를 나눈다. 나름 진지하다 못해 장시간 돌부처처럼 꼼짝도 않고 눈알만 약간 굴리며 시건방진 젊은이가 빠르게 지나가면 속으로 혀를 끌끌 차고 또래의 늙은이가 기운 없이 느릿느릿 지나가면 자신도 모르게 눈꼬리가 쳐지며 지친 눈길로 멍하니 바라본다. 松下老人들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실까? 알 수 없다.

카테고리 없음 2022.05.10

나물캐는 아낙

나물 캐는 아낙 셋 바구니 대신 까만 비닐봉지 옆에 들고 하늘거리며 재잘재잘 햇살 가득한 산길을 내려온다 작년에 취나물이 있었다네 올핸 없어요 쪼만해서 그냥 내려오는 길예요 해해거리며 댓구도 잘하네 암것도 모르는 도시 아낙들 살랑대며 산길 걷는 것만으로도 스스로 만족할만한 증폭된 허상 헛된 포만감 가득 표정만은 맑고 밝다

카테고리 없음 2022.05.07

두릅과 취

경기북부의 들녘에도 매우 분주한 움직임이 포착됩니다. 만약 지구 생명의 종말이 온다 하더라도 저 지독한 생명력의 풀들은 남아있으리라. 하루를 통째로 풀 뽑기에 매달렸으나 목표치의 반에도 미치지 못했어요. 해가 한참 기울 무렵 허리 펴고 파릇한 숲 쪽으로 눈을 돌려 두릅나무의 상태를 살펴요. 며칠 새로 새로운 순이 돋아 두 번째 수확의 기회를 운 좋게 맞아 한주먹 조심스레 땄습니다. 낙엽 사이로 취나물도 간혹 보이는군요. 취나물도 한주먹 채취하였지요. 시장에서 사 먹는 나물과는 차이가 크군요. 우선 향이 짙고 맛이 강합니다. 저녁식사 한 끼를 아주 맛있게 잘 먹었네요. 풀과의 거의 전쟁 수준의 전투를 치르고 축 늘어진 피로를 두릅과 취나물로 싹 풀었습니다.

카테고리 없음 2022.05.05

선동보리밥

간판으로는 서민들이 즐겨 찾는 소소한 음식점으로 보여지기 십상입니다. 하지만 한번 맛을 본 사람은 반드시 다시 찾게 되는 전통의 맛을 고이 간직한 명가 중의 명가입니다. 같은 재료 같은 조리법 그런데도 맛의 미묘한 차이는 우리의 미각을 잠시라도 속일 수가 없어요. 도저히 알 수 없는 그 맛의 차이를 우리는 편리한 대로 손맛이라고 하지요. 선동 보리밥 그 오묘한 고조선 전통의 맛은 손맛이라고 밖에 달리 표현할 바가 없습니다. 성북동에 있어요.

카테고리 없음 2022.05.03